《너무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참여 작가
김민, 조희수, 차재민, 최보련

기획
진세영

전경사진
박기덕

전시 기간
2022년 8월 19일(금) ~ 2022년 9월 18일(일)

관람 시간
11:30-19:30 (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 휴관)

주최 및 주관
공간 힘

후원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

*전시의 제목은 리아의 에세이/칼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 '병든 밀레니얼,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스케치', <참세상> (2021.01.19.)


《It’s Such a Complete Mess That a Revolution Seems to Be the Only the Answer》

Artists
Min Kim, Heesoo Cho, Jeamin Cha, Boryeon Choi

Curator
Se Young Jin

Period
19th August - 18th September 2022 (Closed on Mondays)

Opening hours
11:30-19:30

Support
Busan Metropolitan City, Busan Cultural Foundation



《너무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주체가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서로가 복잡하게 뒤엉켜 서로의 적이 되거나, 고립된 개인으로 자기자신을 해치게 되는 경향성을 시각적으로 짚어봅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상황을 돌파하려는 의지, 문제상황 속에 발견 가능한 전환의 계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방문 부탁드립니다.

《It’s Such a Complete Mess That a Revolution Seems to Be the Only the Answer》 is an exhibition that visually explores the tendency of the subjects of our society to fail in solidarity today, to become enemies in a complicated entanglement with each other, or to harm themselves as isolated individuals. Furthermore, the exhibition tries to seek the will to break through this problematic situation and the chance of transition embedded in it.

(전시서문) 유토피아적 충동을 인내하기, 구체적으로 몰락을 더듬을 것

1. 어떤 난항
전시제목인 “너무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리아의 한 에세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리아는 20년 동안, 밤에 잠을 쉽게 청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면에 얽힌 지난한 경험담이 이어지다가,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리아는 다소 느닷없이 혹은 나지막이, 어쩌면 울분에 차서, 혁명을 읊조린다. 불면에 얽힌 병을 제대로 찾아내거나, 적합한 처방을 받는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라곤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날 뿐일 것을, 리아는 분명 직감했다. 약의 부작용, 병원비, 출퇴근과 업무, 돌봄, 가족 문제……. 따라서 이러한 불면의 문제는 정상-수면 패턴의 획득이 해답이 아니라, 지금과는 아예 다른 현실이 지금 현실의 자리에 놓여, 세상이 바뀌었을 때 비로소 나아질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무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와 같은 난처함과 고독하게 짜증나는 되풀이 속에서 떠오르는 말이다. 원문에서 단독으로 떼어놓은 이 문장은 자극적이고, 거리낌이 없어 보이지만, 이 말은 속 시원한 외침의 톤에서 발음되긴 정작 어렵다. 멸망, 종말, 몰락에
마음을 내어주며 기대보는 것도 달콤하고 좋겠지만, 그렇다면 ‘아아, 혁명하고 싶다!’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본 전시에서 제목으로 놓인 이 문장은 ‘총체적’이라는 인식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혁명’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총체적’이란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혁명이란 거대한 말로 결코 뭉뚱그려질 수 없는 현실을 말한다. 결국 우리는 상당히 세밀한 수준으로 혁명이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께 알아가고, 그러기 위해서 이 난항을 풀어 헤쳐나가야 할 뿐이다.

*리아의 해당 에세이는 <참세상>, 2021.01.19.일자에 「병든 밀레니얼,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기고되었고, 이후 한유리,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 (중앙북스, 2022)에 수록되어 출간되었다.

2. 지속하는 감각과 지연되는 세계
정치적 냉소주의 내지는 진보 진영의 패배주의가 만연하다는 정치적 의견은 해마다 그 양이 늘고 있다. 시간이 흘러오며 제법 축적된 운동과 쟁취, 진보의 경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80년대 한 대학교 운동현장에 연대 발언하러 연단에 올랐던 어떤 위인은, 자신을 위해서 학생들이 준비한 코카-콜라를 보면서, ‘누가 미제의 똥물을 갖다 두었는가!’ 하고 혼을 냈다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어르신은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사실 이런 일화가 아니더라도 옛적에 이미 찾아온 줄 알았던 이념의 종말, 이른바 탈정치의 세계는 늘 새롭게 나타나며 계속해서 그 부피를 늘려나간다. 그저,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는’ 확실히 선악의 구도 속에서 명백한 싸움을 이어오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오늘날 투쟁의 현장에서 투사들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지위 차이가 있을 뿐인 같은 계급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늘고 있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탄압하는 자들은 같은 일터의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노동현장 바깥으론 임대료를 갑작스레 올리며 임차인을 내쫓으려 하는 일도 많다. 부동산 문제로 얽힌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라고 해서 연대가 아예 형성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연대가 형성되어 현장이 만들어져도, 여기서도 사람들은 엄중한 국가권력이나 자본을 쥔 권력자들과 싸우기 보다는, 당장엔 건물주가 고용한 경비용역업체의 파견 노동자 일군과 싸워야 한다. 이제 연대자들은 그러한 투쟁의 장에서 저 자신들의 위급한 순간에, 종종 경찰을 부르고 찾는다.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나 자본 권력이 신자유주의의 물살에 올라타며 비가시적으로 변모한 것보다도, 당장에 같은 처지나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서로 싸워야 하는 국면이 나타났단 것이다.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시위하면 학생들이 시끄럽다고 고소장을 접수한다.

*해당 에피소드는 시사만화가 윤서인에 의해 조롱거리로 화제가 되어 확산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정확한 출처 없이, 과거의 맥락을 탈각한 상태로 퍼져나가 조롱과 혐오의 양상을 생산하고 있기에 정확한 출처를 남겨둔다: 때는 1986년으로 당시 연세대 노천극장에는 ‘전방입소거부’ 집회로 모인 군중 다수가 있었다. 당시 코카콜라를 준비했던 부총학생회장은 현재까지 데모당 활동을 하고 있는 이은탁이다. 나는 이 말을 냉소와 조롱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역사라는 것에서 느껴지는 단절의 감각을 이야기하고자 쓰고 있다.

3. 물러나면서도 사유하기를 포기하지 말 것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테러를 이야기하면서/이야기하기 위해서 ‘자가-면역’이란 개념을 설파한 적이 있다*. ‘자가-면역’이란 바이러스와 싸워야하는 항체가 ‘나’와 ‘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같은 항체를 오인하여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현상과 더불어, 사회적 풍경의 한 단면을 포착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 노동자와 노동자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곧 ‘자가-면역’의 풍경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 그 사회의 중단을 말하는 것 역시 ‘자가-면역’인 것이다. 때문에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자가-면역’의 운동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자가-면역’의 원리란 문제의 원리이기도 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해답의 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작동하는 ‘자가-면역’의 문제는 너무도 많이 식별되고/식별될 수 있기에, 이는 분명 총체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이에 ‘급발진’과 ‘냅다’ 등, 일종의 상황을 엎어버리는 것으로 초월하는 태도-감각이 미시적인 층위의 생활에서 인기를 누린다. ‘혁명’이란 단어 또한 모종의 밈(meme)이나 ‘드립’의 대상이 되어가지만, 문제가 파편적이지만 상당량인 만큼, 혁명 역시 상당 수준으로 세부적으로, 세밀하게 요구되어야 하고 발현되어야 한다. 총체적이라는 말이 그런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이란 것은 갖가지 파편들이 종합의 형태로 묶이는 것을 말하지, 그저 불분명한 단 하나의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총체적인 문제에 내려지는 혁명은 다시 총체적인 문제로 돌아간다.

*자크 데리다의 이러한 관점이 가장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은 ‘자가-면역,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자살’이란 인터뷰/텍스트에서다. 해당 글은 지오반나 보라도리의 『테러 시대의 철학』(손철성·김은주·김준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되어있다.

4. 기대하고 몰락을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복하기
총체적인 문제라서 혁명이 필요한데, 우리는 정말로 총체적인 인지로 얻어진 혁명을 말하고 있는가. 본 전시는 혁명을 말하다가도 느닷없이, 당연하게도 되돌아간다. 이것은 역시 리아가 에세이에서 진행한 방식과도 겹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혁명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있단 걸 알아차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며 그것을 연습하는 것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건 쉽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라는 말이 있다. 쉬운 종말이 있고 어려운 종말 있는 것이다. 어려운 종말이 어려운 이유는 내 몸이 아파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은행 창문에 벽돌을 던지지?” 같은 물음을 누군가 던졌을 때*, 그러니깐 일종의 종말-촉발에 가담하고자 자에게 우리가 섣불리 들려줄 답이 없다는 데에 있다. 문제는 너무나 파편으로 여기저기 흩뿌려져 총체적인데, 혁명이 간단하고 명료할 수 없는 법이다. 다음으로 펼쳐져야 할 혁명이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총체적인 현실이 더 드러나고, 비춰져야 한다. 본 전시는 그러한 시도의 첫 단추이다.

*이 물음은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에서 제기되었다. 해당 텍스트는 웹진 <OFF MAGAZINE>(off-magazine.net)에서 허지우의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

(글: 진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