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 ) 여러분》

참여 작가
박민하, 이병수, 정여름, METASITU

기획
강주영

전경사진
주용성

전시 기간
2022년 6월 21일(화) ~ 2022년 7월 17일(일)

관람 시간
11:30-19:30 (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 휴관)

주최 및 주관
공간 힘

후원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


My fellow citizens

Artists
Minha Park, Byungsu Lee, Yeoreum Jeong, METASITU

Curator
Joo Young Kang

Period
21 June - 17th July 2021 (Closed on Mondays)

Opening hours
11:30-19:30

Support
Busan Metropolitan City, Busan Cultural Foundation

전시《존경하는 ( ) 여러분》은 2018년 예멘인 난민신청자와 2021년 아프간 특별기여자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상반된 반응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시는 한국이 다른 국가의 분쟁에 가담하면서 난민은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 모순된 현실을 다룹니다. 박민하, 이병수, 정여름, METASITU의 작업은 층별 아카이브와 대응되어 난민법 관련 국민청원의 답변으로서 전시장에 제시됩니다.


Welcome to the second exhibition of the year at Space Heem. 《My fellow citizens(존경하는 ( ) 여러분)》 is an exhibition that started with a question about the conflicting reactions of Korean society regarding the entry of Yemeni refugees in 2018 and Afghan 'special contributors' in 2021. The exhibition deals with the contradictory reality of South Korea's unwillingness to accept refugees while engaging in conflicts in other countries. Each work by Minha Park, Byungsu Lee, Yeoreum Jeong, and METASITU corresponds to the archives by floor. They are presented as answers to The National Petition related to the Refugee Act of Korea.



존경하는 ( ) 여러분

이나라
이미지 문화연구자. 영화, 무빙 이미지, 재난 이미지, 인류학적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

2014년 무렵 발발해 2022년까지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예멘 전쟁은 국제화한 내전이다. 뒤엉킨 정치, 종교, 종족 갈등으로 촉발된 내전은 이후 무기와 군대를 제공하는 국제 사회의 전쟁이 되었다. 국제 사회가 주도하는 봉쇄 전략과 무관하지 않은 생활필수품 부족과 전염병 창궐에 따라 예멘 인구는 위협을 겪고 있다. 2018년 국제기구에 따르면 예멘 총인구의 삼 분의 이가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다고 한다. 예멘 난민 484명이 한국의 문을 두드린 것은 바로 이 시기다. 그러자 대한민국 국민을 자처하는 이는 청와대 게시판에 “과연 대한민국이 난민을 받아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포함한 국민청원을 등록한다. 이에 따라 난민 지위에 대한 ‘요청’과 난민 지위를 허용하지 말라는 ‘요청’, 두 개의 요청이 대면했다. 이 두 요청은 나란히 놓여도 좋은 요청인가? 생존의 요청과 생존 요청을 더 쉽게 거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요청은 같은 위급함을 지닌 요청인가? “대한민국이 난민을 받아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애초에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이는 말과 법을 통해 배제를 확인하고 보이지 않게 하고, 존재하지 않게 하는 신문(訊問)1)이다. 존재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말의 폭력은 어떤 응답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존재가 조사하고 식별하는 말의 폭력에 노출될 때 말하기를 멈추게 되는 상황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법의 내용을 바로잡기에 앞서 법이란 조사하고 식별하는 신문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 자체의 폭력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전시 <존경하는 ( ) 여러분>(My fellow citizen, 2022.6.21.-7.17, 강주영 기획)은 환대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능을 목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시는 한국 사회가 실은 난민을 생산하는 구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난민 거부의 이유로 난민과 무관함을 내세우는 한국이 난민 생산 기계인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라는 모순된 현실 말이다. 이에 따라 전시는 전쟁과 전쟁의 이미지, 전쟁과 지각, 전쟁과 장소 등의 주제를 다룬다. 전쟁의 이미지, 지각, 장소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의 시공간뿐 아니라 전쟁이 감각하게 하는 시간의 간격과 공간의 간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여기와 전쟁 상태를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 여기 사이의 간격의 문제이고, 우리가 이 간격과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다.

전쟁과 전시장 지하 공간과 2층 공간은 먼저 난민 청원, 무기 수출에 관한 여섯 개의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한국을 폭로한다. 2018년 예멘 난민 제주도 입국 당시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 게시문,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 조성에 사용되고 있는 현대건설 굴착기 사진, 정부 수반의 UAE 방문과 군대 파견, 군사 무기 수출 보도 자료와 기록물 등이 전쟁에 협력하고, 난민을 생산하면서도 난민을 거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요약한다. 한국, 이스라엘, UAE 아카이브와 같은 장소에 전시된 박민하(<이중거울논고> 2019-2015, <전략적 오퍼레이션-하이퍼리얼리스틱> 2015), 이병수(<하강의 소실점> 2021), 정여름(<천부적 증인께> 2021), METASITU(<Tora Bora> 2016)의 영상 작업은 너무 잘 보여서 볼 수 없거나, 한눈에 보이지 않으나 현재하는 전쟁, 분쟁, 재난의 표상, 작동과 유산을 제각각의 방식으로 해부하는 작업이다. 볼거리와 분리될 수 없는 전쟁의 스펙터클을 조명하는 일은 전쟁 속에 발생하지만 철저하게 비가시적인 존재로 남겨지는 난민을 조명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하에 전시된 이병수와 박민하의 작업은 전쟁과 난민, 전쟁과 지각의 쌍을 탐문한다. 이 중 이병수의 <하강의 소실점>은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된 미사일 사일로(지하 발사대)의 텅 빈 내막을 들춰보는 작업이다. 이병수가 카메라를 손에 쥐고 내려간 사일로는 냉전 시기 미국 본토 내륙에 세워진 시설이다. 핵 감축 시대에 들어서며 미사일 발사대에 대한 군사적 수요가 줄어든 탓에 사일로 시설은 민간에 매각된다. 이 시설은 이제 민간업자가 판매하는 전지구적 재난의 피난처가 될 안전 벙커가 된다. 실사 촬영과 그래픽 영상을 합성한 이병수의 미사일 사일로 영상은 군사 시설과 민간 시설, 핵무기의 전쟁 억지력으로 이루었던 과거의 “총력적 평화”(total peace, Paul Virilio)와 전쟁 상태도 평화 상태도 아닌 현재, 일상화된 군사적 사례인 “순수 전쟁”(pure war, Paul Virilio)의 현재가 중첩된 공간을 보여준다2). 총력적 평화와 순수 전쟁이라는 탈출구 없는 상황을 환기하는 촬영 영상과 그래픽 영상에 요란한 사운드 푸티지가 덧대어진다. 이는 종말의 서사 안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거처를 광고하는 말들인데, 이 광고 소음으로 인해 광고 문구 특유의 낙관적 (탈출) 가능성과 묵시론적 (탈출) 불가능성의 기괴한 동시성이 한 번 더 부각된다. 다시,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도시 공간은 전쟁 구조물을 모방하는데, 벙커는 그 탁월한 사례다. 우리는 전쟁 시기 전략적 요충지인 특정 지형과 장소를 보호할 목적으로 벙커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폴 비릴리오가 보기에 벙커는 반대의 방식으로 생산된다. 실제로 일어난 전쟁의 필요에서 벙커를 짓는 것이 아니라 벙커를 짓는 일이 오히려 군사적 충돌을 기획한다. 벙커와 같은 구조물을 지으면서 도시는 군사적 가능성을 가진 인위적 통제 공간을 ‘앞서’ 상상한다. <하강의 소실점>에 등장하는 상품화된 사설 피난 시설 벙커 역시 ‘무질서’한 위기를 물질화하는 대신 인위적인 ‘통제’ 공간을 물질화한다는 점에서 군사 벙커와 같은 논리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전쟁의 논리에 따라 구조화된 도시와 사회일수록 난민을 두려워한다. 난민은 월경하고 이탈하는 존재로 군사 계획에 따라 구성된 통제 공간에 무질서를 생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병수의 스크린을 지나 박민하의 단채널 영상 <전략적 오퍼레이션>과 쓰리 채널 영상 <이중거울논고>가 설치된 방에 들어선다. 방에 들어서는 우리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UAE와 한국의 군사적 밀약을 드러내는 간단한 아카이브 자료다. 이 중에는 “진짜 태양의 후예가 나타났다, 제2탄!!”이라는 제목이 붙은 UAE 군사협력단 ‘아크부대’ 홍보 자료도 있다. 홍보 자료의 제목은 전쟁이란 모방을 모방한 리얼리티, 재현된 리얼리티를 카피한 시뮬라크르로서의 리얼리티라고 떳떳하게 과시한다. 박민하는 <잡을 수 없는 눈 이야기>, <코스믹 칼레이도 스코프> 등에서 환영의 끈질긴 매혹을 다루어 왔다. 사막은 ‘보기’(seeing)의 문제 속에서 감지되는 실재와 환영 사이의 모호한 관계가 전면화되는 공간이다. 사막은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연결이 쉽게 끊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오퍼레이션>은 이집트 사막의 스크린 없는 영화관, 사막을 배경으로 한 카운터 컬처와 공상과학 영화 푸티지를 통해 사막의 시각성을 예시한다. 다른 한편 20세기 이래 사막은 가장 격렬한 지정학적 충돌이 빚어지는 공간이다. 박민하는 전쟁 영화의 촬영 현장으로 사용되다 실제로 중동에서 전투를 수행할 미군의 “실시간 트레이닝” 센터로 사용되는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의 바그다드 세트장의 사례와 광학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광학을 무기의 논리로 개발하는 시각의 정치성과 미디어를 훈련의 일환으로 흡수하는 전쟁의 시각성을 동시에 목격하게 한다. 세르즈 다네(Serge Daney)는 전쟁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이미 “우리는 이제 세계의 증인이기보다 세계의 이미지의 증인”3)라고 쓰지 않았던가. 모하비 사막의 세트장은 출발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영상이 도착하는 원격 현전(tele-presence)의 상황을 생산한다. 폴 비릴리오는 원격 현전의 상황 속에서 나의 시선의 범위 안에 있는 것과 나의 몸이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간격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런데 가상 현전은 이제 나의 몸에게 ‘가상적’ 몸과 활동의 ‘가능성’까지 제공한다. 모하비 사막의 실시간 군사 트레이닝은 이러한 현상의 한 사례다. <이중거울논고>는 바그다드 사막을 모방하는 모하비 사막을 도플갱어 현상에 비유한다. 거울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만나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라는 도풀갱어의 전설을 환기하며 박민하는 무한히 증식하는 환영의 장소를 상영하기보다 이중거울의 논리를 재고하고자 한다. 11세기 이라크 광학자 이븐 알 하이삼이 빛의 궤적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았던 것처럼.

2층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관람객은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 당시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 및 개헌 청원문 인쇄문을 목격하게 된다. 인쇄문을 지나 METASITU와 정여름의 작업이 전시된 상영장에 도달할 때면 하룬 파로키(H. Farocki)가 <꺼지지 않는 불꽃 Nicht löschbares Feuer>>에서 단호하게 내뱉었던 문장이 귓가를 맴돈다. “우리가 당신에게 네이팜탐 부상자를 보여주는 일은 당신의 감수성에 상처를 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감수성에 상처를 준다면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네이팜탄을 사용했다는 듯 느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매우 축소된 네이팜탄 효과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콜렉티브 METASITU의 영상 작업은 팔레스타인 채석장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인부들이 피부와 몸에 쌓이는 먼지를 일컫는 말 Tora Bora를 제목으로 삼았다. 팔레스타인 인부들이 캐고, 옮겨 절단하고 가공하여 수출하는 라임스톤, 곧 ‘예루살렘 돌’은 팔레스타인의 땅에 국가를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식민의 상태로 몰아넣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오랫동안 물질화해 온 돌이다. 고대 시대 이후 유대교는 라임스톤을 종교 제례를 위한 건축에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Tora Bora>를 구성하는 라임스톤 채석장과 석재 가공 공장의 일면 스산하고 일면 기계적 풍경은 폐허의 멜랑꼴리나 애도의 광경을 현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상물 속에서 보고 있는 것은 점령군의 제단에 쓰일 재료가 생산되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채석장의 먼지들은 풍경론(風景論, Fûkeiron)을 제창했던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 속 오사카와 요코하마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 조성에 사용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 굴착기 사진과 UAE에 대한 세일즈 야심을 감추지 않는 대통령 연설문 아카이브 옆을 지나친 관람객은 8시간 15분에 달하는 정여름의 영상 작업 <천부적 증인께>의 막연한 순간에 도착한다. 이병수, 박민하, METASITU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정여름의 작업 역시 전쟁, 분쟁, 식민주의의 맥락을 바탕에 두고, 미디어의 문제를 경유한다. 박민하의 작업이 지각 이미지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전쟁과 세계의 관계를 사례로 들었다면 정여름의 <천부적 증인께>는 전쟁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쟁과 미디어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가는 전작 <그라이아이 : 주둔의 신>과 <긴복도>에서 이러한 주제 의식을 이미 도드라지게 드러낸 바 있다. <천부적 증인께>에서 정여름이 인터넷에 자신을 연결한 채, 다시 말하면 분쟁의 시공간에 자신을 연결한 채, 끝없이 모은 이미지는 공습이 진행되고 가자 지구 시민들이 인터넷에 스스로 업로딩한 영상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쉽게 정여름의 아카이빙 작업의 의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정여름은 “‘느닷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고 우리에게 다시 구성해야 할 해석의 ‘생생한 밑그림’을 제공”하고 “결코 예견할 수 없는 ‘실재효과’를 풀어 놓는”4) 아카이브의 속성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작가의 개입을 통해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미군 주둔기지의 작동방식에 대한 단서를 엮어나가던 작가의 전작과 달리 <천부적 증인께>는 관객, 곧 증인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증인의 눈앞에 재난 지구의 시간을 곧장 가져온다. 이 작업은 가공되지 않는 아카이브를 내세워 오늘의 목격자에게 열망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일까? 간간이 들려오는 포탄 소리, 어둠, 섬광, 피난의 방향을 확신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무리, 한낮의 가자 지구의 이미지가 1시간 30분, 8시간 15분에 이르는 분량의 영상을 채운다. 그리고 폭력사회의 후일담 혹은 우화의 보이스 오버가 이미지의 시간을 대체로 배반하며 이미지에 엮어져 있다. 이보다 정여름의 작업은 우리에게 아카이브의 내용보다 아카이브를 채굴하고 관람하는 시간,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간, 신체의 시간, 신체에 들러붙다 신체를 장악하는 감정과 무감함의 발생과 전개 자체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재난의 시간을 경험하는 대신 욕망과 윤리가 날을 세우는 증인, 목격자, 관객의 예견과 기대의 시간을 경험한다.
이것이 전시 “존경하는 ( ) 여러분”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경험의 성격이다. 윤리 없는 윤리의 시간을 경험하기, 윤리를 바닥에서 새로이 정립하는 분쟁의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1) 도미야마 이치로는 식민주의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비판을 빌려 국가기관이 조사를 위해 말로 질문하고 강제로 답하게 하는 신문과 같은 말의 폭력이 횡행하는 공간을 일컬어 ‘신문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도미야마 이치로, 심정명 옮김,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 문학과 지성, 2020.

2) 폴 비릴리오는 공중 폭격을 사용했던 총력전인 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의 개발과 핵을 통한 억지라는 논리가 시민의 불안을 일반화하는 시대를 총력 평화의 시대라 지칭한다. 총력 평화는 평화로 둔갑한 총력전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순수 전쟁 역시 총력 평화와 긴밀히 연결되나 과학 발전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으로 우발성 제거하고 전능함을 발휘하는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신비한 표상이 되는 상태다. Paul Virilio, Défense populaire et luttes écologiques, Paris, Galilée, 1978. Paul Virilio, L’insécurité du territoire, Paris, Galilée, 1993.

3) Serge Daney, La maison cinéma et le monde-2. Les années Libé, 1981-1985, Paris, P.O.L, 2002.

4) Georges Didi-Huberman, Images Malgré tout, Edition de Minuit, Paris, 2003.